자기 부인의 개념
[루가의 복음서 9장]
23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24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흔히 자기 부인을 희생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그러나 감히 고백하건데, 반만 맞는 소리다. 위의 말씀을 읽어보자. 자기를 버리라고 했지만, 결국 살라는 말씀이다. 무슨 말이냐? 자기를 버리는 길이 사는 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뭐?”라는 생각을 가진 영혼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자기 부인이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기 아닌가요?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기 아닌가요? 그 자기도 부인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이렇게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할텐가? 예수의 말이니까 꿈뻑 죽고 따라야지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일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그리고 그런 성향이 극단적으로 가면 전체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건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치즘과 파시즘을 위시하여 일어난 세계 2차 대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글은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하기 위해서 쓰여진 글이 아니다. 사실 이 글이 가장 첫째로 삼는 대상 독자는 나 자신이다. 내가 바로 그런 성향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를 감싸안기보다는 질책하는 것이 더 쉽고 편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게 맞는지 계속 의문이었다. 어디까지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건지 누구도 명쾌하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태오의 복음서 22:39]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는 너희가 이미 사랑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네 몸과 같이.’ 인간은 누구나 이기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이웃은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한편, 자기는 버리라고 가르치신다.
그런데, 자기 부인이 자기 학대 같이 느껴진다면? 자기 부인이 자기 혐오처럼 느껴진다면? 과연 그것은 길인가?
뭔가 아닌 것 같았다. 나에게는 보다 따뜻한 나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했고, 필요하다.
악은 누구에게나 숨어있다. 하나님이 이런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 내놓기를 아까워하지 않으셨다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죄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아직 이 세상에 난지 30년이 채 되지 않은 나의 소박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자기 부인은 자기 혐오나 자기 학대와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은 자기 수용과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자기 부인은 이기심 부인이지, 자책이 아니다.
예수가 말한 자기 부인은 표면적으로는 단방향인지 모르겠다. 자기를 드높이는 교만을 부인하라(=이기심 부인). 그러나 인간이 추구해야 할 자기 부인은 양방향이어야 한다. 이기심 부인의 명령에 다음 명령을 더하라. 자기를 파괴하는 자기 혐오를 부인하라(=자책 부인). 전자만을 강조하면 개인의 주체성이 사라지고 극단적으로 가면 전체주의를 낳는다. 그렇다고 후자만을 강조하면 개별성만 남고 질서를 붕괴시키는 냉소주의나 허무주의를 낳는다. 어느 쪽이든 전혀 건강하지 못하다.
나의 견해가 누군가에게는 일견 말씀을 변개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또는 애써 내 생각에 말씀을 끼워 맞추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해석이 ‘통전적’인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창세기 1:27]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받는 일이 없습니다.
균형이 중요하다. 성경을 보면 로마서 및 바울 서신에서는 이신칭의를 말하는 것 같으나, 야고보서 및 예수의 일생을 다룬 사복음서는 이행칭의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 주장이 하나의 진리일 수 있는가? 이런 문제 앞에 개인의 성향에 따라 한쪽 편을 강조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한 것 같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해야 할 때는 이신칭의가 맞고, 인간의 응답을 강조해야 할 때는 이행칭의가 맞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이행칭의가 강조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가르침의 일차적 대상이 유대인들, 특히 위선적인 율법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율법과 관계없이 누구든 포용하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다. 그런 관점에서는 이신칭의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이 바르게 산다는 것은 자기 수용과 자기 부인, 용기와 겸손, 사랑과 진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중용이 옳으니까 중용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치우치면 병이 드니까 중용을 추구하는 것이다. 듣고 경험해보니 둘 다 맞는 소리니까 인정하는 것이다. 날 때부터 완전한 사람은 없으니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즉 자연스러운 삶의 이치이자 결론이다.
치유하는 빛, 기쁜 소식은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전해진다.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절망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책망을, 슬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위로를.
수술대에 올라가기 전에 환자는 자기가 어디가 아픈지 알아야 치료받을 수 있다. 즉 각자가 자기 내면을 세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