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신앙 묵상

(로마서 3장 22절) 이신칭의로 가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 - the faith of Jesus Christ (faith, 믿음, 피스티스)

redsiwon 2023. 2. 5. 08:57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1~5, 개역개정)

 

아멘. 할렐루야! 선하신 하나님, 성실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이 글은 2월 5일 일요일 새벽 다섯 시에 이사야서 11~12장을 묵상하다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눈물의 감사와 위로와 반성과 회개 후에, 11장에서 예표된 메시아의 성품 중에서 특히 성실(אֱמוּנָה 에무나)에 영감을 받아,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로 인해 비롯된 오해를 지적하고 로마서를 포함한 신약성경에서 가르쳐주는 '성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교리를 되찾아보고자 쓴 글입니다. 이하는 편의상 어투를 간결하게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충돌

로마서 3장 22절을 통해 두 표현을 비교해보자.

로마서 3장 22절 역본대조
[개역개정]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새번역]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말]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킹흠정역]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KJV1769] Even the righteousness of God which is by faith of Jesus Christ unto all and upon all them that believe: for there is no difference:
[NIV2011] This righteousness is given through faith in① Jesus Christ to all who believe.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Jew and Gentile, ▷ ①Or through the faithfulness of
[NRSV] the righteousness of God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① for all who believe. For there is no distinction, ▷ ①Or through the faith of Jesus Christ
[ESV] the righteousness of God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for all who believe. For there is no distinction:

 

로마서 3장 22절을 우리말 대표적인 역본인 개역개정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친다고 한다. 새번역,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KJV의 한글 역본인 흠정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헬라어에는 속격이라는 문법 표현이 있다. 현대식 영어로는 소유격인데, 주체가 대상을 소유하는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속격은 '~의'로 표현하고, 영어로는 'of'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the noise of the city'라는 어구는 '도시의 소음'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을 '도시가 갖는 소음'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다. 

 

헬라어에서 나타나는 속격의 형식은 A B(속격)의 어구로 나타난다. 이것은 영어로 A of B로 치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서 성도들을 부를 때 자주 쓰는 표현인 ἀδελφοί μου(아델포이 모우)는 뒷 단어가 '나'를 의미하는 ἐγώ(에고)의 소유격으로, 해석은 '나의 형제들아'가 된다.

 

위 로마서 3장 22절의 헬라어 원문은 위와 같이 A B(속격) 형식의 어구를 포함하는데, 믿음을 의미하는 πίστις(피스티스)가 A이고, 뒷 부분에 예수 그리스도가 B(속격)의 구조를 띄고 있다. 그래서 직역 위주로 번역한 KJV에서는 faith of Jesus Christ로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원문은 속격인데 흠정역을 제외한 다른 우리말 역본에서는 왜 속격으로 번역되지 않은 것인가?

루터 이전 위클리프 성경, 제네바 성경, KJV까지만 해도 속격을 속격 그대로 번역했다고 한다. 그런데 루터 본인이 이신칭의 교리로 큰 은혜를 받아서인지, 사람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예수님)의 믿음/믿음직함을 의미하는 다른 모든 부분마저 싸그리 사람의 믿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KJV에서는 그 원형이 영어식으로 남아있는데 그 예시는 다음과 같다.

 

신약에서의 피스티스πίστις(믿음) (in KJV)

the faith of Jesus Christ - 롬3:22, 갈2:16, 3:22 (속, , 속)

the faith of Christ - 갈2:16, 빌3:9 (속, )

the faith of the Son of God - 갈2:20 (여 . . 속 속 속)

 

the faith of God - 롬3:3 (대, ) “그런데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무효로 만들겠느냐?”(롬 3:3, 킹흠정역)

the faith of our Lord Jesus Christ (대, , 속, 속, 속)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고서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말라.”(약 2:1, 킹흠정역)

the faith of him (속,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믿음을 통해 담대함을 가지며 또 확신 있게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킹흠정역)

the faith of Jesus (대, )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나니 곧 여기에 [하나님]의 명령들과 예수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더라.”(계 14:12, 킹흠정역)

the faith of the operation of God (속, 속, 속, , 속, 속)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믿음을 통해 침례 안에서 또한 그분과 함께 일어났느니라.”(골 2:12, 킹흠정역)

 

놀랍게도 필자가 찾아본 바로는 신약에서 피스티스 직후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격은 모두 속격이다. 신약에서 피스티스(믿음)가 등장하면 그것의 주체가 하나님/예수님인지 사람인지 잘 분별하며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을 통해 피스티스의 우리말 역어를 살펴보기

잠깐 옆길로 들어서서 피스티스가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되고 있고, 그 역어들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 과정이 생각보다 '믿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보통의 피스티스에 대해서 흔히 번역되고 있는 단어는 믿음, 미쁘심, 충성 등인데, 유의어로는 신뢰, 신실, 진실함 등이 있다. 그런데 피스티스가 속격(소유격, ~의)과 함께 쓰인 경우에는 앞서 본 예시와 더불어 이상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대격(~에 대한)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믿음과 연관된 단어들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믿음은 어떤 일이나 사람의 말을 사실로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 의미이고, 어떤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믿는 것과 더불어 그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을 함께 내포할 수도 있다(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의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바로 다음에 신뢰의 의미를 통해 알아보자.

 

신뢰는 굳은 믿음과 의지함을 함께 뜻한다. 즉 대상에 대한 믿음의 정도가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함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 대상에게 마음을 기대어 도움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의지한다는 것은 겸손과도 연관이 있다. 어떤 일에 대하여 내가 내 힘만으로 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존재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신뢰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 즉 서로의 낮아짐을 의미한다. 믿음은 상황에 따라 의지함의 성격을 내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데, 이에 반해 신뢰는 의지함의 성격을 항상 함께 내포하여 관계적인 측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잘 설명한다.

 

미쁘심은 간단하게 말하면 믿음직하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는 믿음성이 있다는 뜻인데, 믿음성은 굳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성질을 뜻한다. 그리고 믿음성스럽다라는 형용사는 믿음직한 성질이 있다라는 뜻이다.

 

성실, 충성은 정성과 함께 의미가 순환적이다. 핵심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진심으로 아끼고 위하고 온갖 힘을 다하려는 진실된 마음과 태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마음이나 사사로운 욕심 없이 단 한 가지만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것에서 벗어나거나 어긋나지 않고 딱 들어맞는 것이다. 간단히 시쳇말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사람이 무언가에 충성되면, 즉 정성을 다하면, 즉 성실하면, 믿음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실은 간접적으로 믿음직함을 의미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실은 믿음직함과 착실함을 함께 내포한다. 착실함은 쓸데없는 것을 하지 않고 꽉차고 완성도 있게 일을 하는 그런 품성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연히 착실하신 분이시다.

 

진실함은 마음에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이 섞이거나 거짓이 있지 않고, 사사로운 욕심이 없고, 바른 것이다. 어떤 대상이 믿음직하기 위해서는, 즉 믿을 만한 믿음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은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진실하지 않은 대상은 믿을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연히 진실하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번역한 이유

자 다시 돌아와서, 그런데 왜 성경 번역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했을까? 2가지 이유를 추정해볼 수 있다. 먼저는 이신칭의 교리에 지나치게 경도된 채 말씀을 번역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말이 안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미 앞서 언급했고, 두 번째 이유에 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정말 말이 안 되는 것일까?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슨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 때문이다. 이것은 나름 합당한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 2가지 측면에서 답해보고자 한다.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이해하기

1. 먼저 하나님도 믿음을 가지신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신앙은 관계다.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으면, 하나님도 사람을 믿어주시기 마련이다.

믿음에 대해서 조금 더 파고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믿음이 크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믿음직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즉 큰 믿음은 믿음직함을 낳는다. 왜냐하면 큰 믿음은 자연스레 행동을 낳기 때문이다. 원래 믿음직함이란 어떤 한 가지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태도를 바라보고 사람의 품성에 대해 평가할 때 일컫는 표현인데, 어떤 사람이 어떤 일/대상에 대하여 믿음이 크면 열과 성을 다할 것이고 그러면 그 사람은 믿음직하게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면 --신뢰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믿음직한 사람이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를 믿음직하게 여기실 --신뢰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신뢰하는 자들에게 일을 맡기신다. 일을 맡길 자를 찾고 계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 12:42, 개역개정)

 

여기서 '진실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πιστός(피스토스)로서 명사인 피스티스의 형용사형이다.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신실함)이라는 바울의 고백(고전4:2)처럼,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바로 믿음직한 태도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하여 믿을 만한 청지기를 신뢰하실 것이고 일을 맡기실 것이다. 즉 하나님도 믿음을 가지신다.

 

2. 두 번째로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피스티스를 반드시 '믿음'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도 인용했지만 the fear of God처럼 the faith of God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the fear of God은 대놓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두려움을 갖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면 어떨까? 하나님께 대하여 느끼는 사람의 두려움은 사람이 갖는 것이지만 그 두려움을 유발하는 근원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이 두려움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외관상 대격(~에 대한)의 형태가 자연스럽지만 본질적으로는 소유격인 of의 형태가 더 자연스러운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표현되는 소유격 어구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각각 두려워할 만한 두려움의 대상이시고, 믿을 만한 믿음의 대상이시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을 피스티스(믿음 faith)에 적용하여 해석해보면 the faith of God의 적절한 번역은 하나님의 믿음직함(=미더움, 미쁨)일 것이다. 실제로 로마서 3장 3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로마서 3장 3절 역본대조
[개역개정]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새번역]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얼마가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납니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습니까?
[우리말] 그런데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시키겠습니까?
[킹흠정역] 그런데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무효로 만들겠느냐?
[KJV1769] For what if some did not believe? shall their unbelief make the faith of God without effect?
[NIV2011] What if some were unfaithful? Will their unfaithfulness nullify God’s faithfulness?
[NRSV] What if some were unfaithful? Will their faithlessness nullify the faithfulness of God?
[ESV] What if some were unfaithful? Does their faithlessness nullify the faithfulness of God?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더라도 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믿음직하심이 변하는 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얼굴도 본 적 없는 로마 성도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번엔 오히려 반대로 킹제임스 흠정역에서 영어 원문에서 벗어난 번역을 했다. faith를 믿음이 아닌 믿음직함/신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은 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나님의 믿음 the faith of God'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the faith of Jesus Christ'으로

그런데 the faith of God(πίστιν τοῦ θεοῦ 피스틴 토우 데오우) - '하나님의 믿음'에서 the faith of Jesus Christ(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피스테오스 이에소우 크리스토우) -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만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되시기에 앞서 믿음의 주체로서 역할을 다하셨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을 믿었고 자신의 거룩한 죽음과 그것을 통한 피의 효력 믿었다(롬3:25). 즉 자신이 죽기까지 순종하면(빌2:8) 자신을 믿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음을 믿고 소망하셨다. 그리고 이루어내셨다! 사람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데(엡2:8), 나의 믿음이 있기 전에, 이 믿음의 본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선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시다(히12:2). 이것이 은혜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이다.

 

그래서 이 작은 번역의 문제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과연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이 문제는 얼핏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매우! 중요한 문제다. 먼저 관련된 구절을 한 번 같이 읽어보자.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5~16, 개역개정)

 

위 말씀은 의로워지는 방법에 대하여 율법의 행위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대비하여 둘 중 무엇으로 의로워지느냐를 다루고 있다. 개역개정대로 해석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하여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측면에서 큰 문제가 있다.

 

1. 먼저 바울 서신에서 위 구절과 같이 'the faith of Jesus Christ'라는 어구와 율법(토라)의 행위가 대비되는데(특히 갈라디아서 2-3장과 로마서 2-4장을 보라), 기존의 해석에 따르면 사람의 믿음과 사람의 행위가 대비되면서 행위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복음은 무어라 하는가?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만 들어간다고 하셨고, 로마서 2장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로워진다고 하였으며, 야고보서 2장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원은 믿기만 하면 되지만, 나무는 열매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 대로 행위로 믿음을 판단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사실 신실함과 같은 것으로서, 믿음에 따른 행동을 함께 내포하며, 이를 통해 믿음만능주의의 오해를 해소할 수 있다.

 

2. 'the faith of Jesus Christ'라는 어구를 포함하는 말씀들(롬3:22, 갈2:16, 2:20, 3:22, 빌3:9 등)은 '칭의(getting in Jesus Christ)' 즉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며, 칭의의 방법이 바로 위의 어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해석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믿음으로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더 나아가 실제로 의로워진다). 그러나 원문을 직역한 해석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더 나아가 실제로 의로워진다). 두 해석의 차이는 구원의 주체가 누구냐에 차이를 낳는다. 구원은 당연히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이다. 구원의 대상도 물론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기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점은 신자의 '믿음'이 구원의 필수요소이기는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절대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으로, 하나님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밧줄을 던져주는 사람으로 비유해볼 수 있다. 물 밖에 있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에게 밧줄을 던져주고 끌어줘서 물에 빠진 사람이 간신히 살아서 나왔는데, "내가 이 밧줄 잡아서 산 거야!" 같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할 수는 없다.

 

원문대로 해석하면 구원의 주체가 믿음(피스티스)의 주체에 따라 '나'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르게 옮겨간다. (그렇다고 사람의 믿음이 무용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밧줄을 잡아야 살 수 있듯이 이신칭의는 여전히 진리로서 유효하다. 다만 진실로 중요한 것은, 내가 밧줄을 잡은 것보다 나에게 밧줄을 던져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밧줄을 강하게 잡을 힘이 있어도, 아무도 내게 밧줄을 던져주지 않으면 나는 그저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믿음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가 진실로 더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성도의 의로워져감(성화 staying in Jesus Christ, growing up to Jesus Christ)은 표면적으로 성도 자신의 믿음이 강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기보다는, 더 본질적으로 성도의 영에 성실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점점 더 깊게 새겨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심지어 더 은혜롭다. 할렐루야..!)

 

3. the faith of Jesus Christ(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피스테오스 이에소우 크리스토우)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번역하면 안 되는 이유는 저자의 본래 의도와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된 어구를 읽으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나의 믿음에 주목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얼마나 믿음직하셨는지를 묵상하라고 권면하는 편지를 썼는데, 번역된 성경을 보는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묵상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 배우는 이신칭의 교리가 연상되어 더욱 그렇다. 심지어 같은 로마서에, 하필 바로 옆 4장에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이신칭의는 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믿음직하심을 바라봐야 할 때 자신의 믿음을 바라보면 초라해지거나 교만해지기 일쑤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the faith of Jesus Christ에 대한 올바른 번역이 아니다.

 

결론: 그래서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앞서 살펴봤던 역어들을 활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성실/신뢰/믿음/믿음직함/신실함/진실함 다 결국 간접적으로 믿음직함의 의미가 상통한다. 다만 예수그리스도의 충성/성실/진실함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뢰/믿음직함/신실함으로 번역하면 피스티스 본래의 의미인 믿음과 더 가깝게 나타낼 수 있다. 물론 신실함은 '착실함'이 덧붙여져서 의미 과잉으로 볼 수도 있지만 착실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한 믿음의 태도에서 따라오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므로 크게 문제 될 것 없을 것 같다. 다만 신뢰는 '의지함'을 항상 포함하는데 반해, 믿음에 대해서는 의지함이 항상 따라오는 성격은 아니니므로 적절한 번역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믿음직함/신실함이 가장 바람직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흠정역이 정직하게 번역했다.) 믿음이냐 믿음직함/신실함이냐의 문제는 이미 구원의 주체와 성경 독자의 시선이 사람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넘어갔으므로 부차적인 문제로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든 믿음직함/신실함이든 사람에게는 그저 한량없는 은혜이다.

 

그렇다고 신뢰나 성실/충성이라는 번역이 마냥 무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뢰는 의지함을 항상 함께 의미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단순히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렸던 수많은 구약의 인물들처럼, 간절히 구하라고 가르쳐주신 복음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함을 묵상할 수 있다. 충성/성실은 결과적인 품성인 믿음직함에 이르게 하는 요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the faith of Jesus Christ)을 본받기 위하여 성실과 충성의 의미를 떠올리며 마음을 새로이 할 수 있다. 실제로 신약에서의 헬라어 피스티스에 앞서 구약에서의 히브리어 '확실하게 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만'(ex.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개역개정) -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이신칭의 언약)에서 파생된 ‘에무나’는 확실함, 견고함이라는 본질적인 의미에 덧붙여, 거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의미(믿음직함, 성실, 충성, 확신, 진실, 책임 등)로 활용된다.

 

구약에서의 에무나אֱמוּנָה

(모세의 팔의) 내려가지 않음=굳건함 - 출17:2

(성전을 위해 일하는 일꾼의) 성실 - 왕하12:15, 22:7

(직분자들의) 책임 - 대상9:22, 대하31:15

안정감, 든든함, 확고함 - 사33:6

진실, 진리 - 잠12:17, 잠12:22, 사59:4, 렘5:1, 5:3, 7:28, 9:3

충성 - 잠28:20

(의인의) 믿음/신실함 - 합2:4

(하나님의) 신실/성실/진실하심 - 신32:4, 삼상26:23, 시33:4, 36:5, 40:10, 88:11, ..., 사25:1, 애3:23, 호2:20

(메시아의) 성실 - 사11:5

 

결론적으로, 위에서 제시한 관점에 따라 갈라디아서 2장 15~16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지 이방 죄인들이 아닙니다. (16) 사람은 토라(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하여 의로워지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토라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의로워지기 위함입니다. 이는 토라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로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갈2:15-16, 직역)

 

복음은 좋은 소식이 아닐 수가 없고, 주의 크신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바로 오늘, 성실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글을 마칩니다.


2023.08.04(금) 내용 추가

일용할 양식의 말씀으로 갈라디아서 3장을 읽으며 깊이 정리가 되었다. 위에 기존에 작성한 내용을 보강, 수정하고 아래 내용을 추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곧 신실함이다. 예수님은 믿음이 충만하셨고 신실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은 연약하고 신실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분 안에서 그 충만하신 데까지 자라간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갈 3:22, 개역개정)

 

정말 중요한 구절인데 다 사람의 믿음으로 번역해버렸다. 개역개정을 조금 바꿔서 바르게 번역해보자.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갈3:22, 개역개정 수정)

 

약속의 근거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죄없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신실함/믿음이다. 그리고 사람의 믿음은 그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이 두 가지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서 1장 17절 다시 보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개역개정)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이 사람의 믿음을 이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 안에서 사람의 믿음은 신실함(믿음의 충만함)까지 자라난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신실함으로 믿음에 이르게, 신실함으로 신실함에 이르게, 믿음으로 신실함에 이르게, 다 보기 나름대로 합당한 번역인 것 같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알고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하박국 2장 4절 다시 보기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개역개정)

 

“그의 믿음”에 대하여 2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먼저는 “의인의 믿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단순히 인간의 믿음을 강조하면 참 부질없다. 중요한 것은 의인이 그것을 믿어서 살게 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해당 하박국 구절 맥락을 보면 이것은 반드시 지체하지 않고 올 정해진 때를 위한 묵시라고 말씀하시는데,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서 살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그의 믿음을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당연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문법적으로 3인칭 단수형으로 쓰인 에무나를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보기에는 뜬금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전자의 해석에다 ‘믿음인데 무엇에 대한 믿음이냐’를 강조하는 편이 보다 의미가 분명하게 와닿는다.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으시면 인간이 아무리 믿어도 인간의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또 한편으로 하나님이 아무리 신실하셔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강권적으로 믿게 하실 수도 있겠고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의 자율성을 무시하지는 않으시고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의 책임으로 남겨두시는 부분이 상당히 큰 것 같다. 성경 말씀을 통전적으로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잇는 통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http://hebrew.pe.kr/xe/?document_srl=756 

 

히브리어 공부 - 이신칭의의 횡포 – 에무나(신실함)와 피스티스(믿음)

이신칭의의 횡포 – 에무나(신실함)와 피스티스(믿음) 1)     들어가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마틴루터의 주장은 종교개혁의 기본골격이다. 중세의 종교인들은 행위로 구

hebrew.pe.kr

히브리어, 헬라어 직역성경을 펴내시고 소천하신 허성갑 목사님의 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글에 보다 많은 참고 자료들이 있다. 다만 참고한 글과 본 글의 입장은 다른 것이, 나는 히브리어의 '에무나'와 헬라어의 '피스티스'가 1:1로 완전히 동일하게 대응될 수 있는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문화와 시대마다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각 단어가 활용된 용례를 통해 의미를 살펴보면 에무나의 기본적인 의미는 확실함, 견고함으로 보여지고, 피스티스의 기본적인 의미는 믿음으로 보여진다. 두 의미는 확실성이라는 성질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엄연한 차이가 있다. 에무나는 보통 확실성이 충분한 상태로서 믿음의 주체는 물론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때 쓰여진다. 그러나 믿음의 대상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피스티스는 확실성이 다소 부족해도 쓰일 수 있다. 따라서 주로 믿음의 주체가 될 때 쓰인다(ex. 주여 믿습니다. 믿음 없음을 용서해주소서..). 교리적인 측면에서 피스티스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쓰일 때는 확실성이 충만한 상태로 faith'fulness' 믿음의 주체는 물론 대상으로서도 기능할 수 있다(사실 유일하게 완전한 믿음의 대상이 되어주신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오직 완전한 믿음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유일하게 완전한 믿음의 주체이자 완전한 믿음의 대상으로서 바라볼 수 있다.

 

그밖에 피스티스 논쟁이라고 검색하면 같은 주제로 다음과 같은 많은 자료들을 접할 수 있다.

http://www.newsn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5912

 

‘그리스도를 믿음’인가 ‘그리스도의 믿음’인가? - 뉴스앤넷

최근까지의 바울서신 해석에 가장 첨예한 논쟁 두 가지는 율법 논쟁과 믿음 논쟁이다.율법 논쟁은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부터 현재의 새 관점 논의로 진화해왔고, 믿음 논쟁은 피스티스

www.newsnnet.com

http://www.reformednews.co.kr/1588

 

≪리폼드뉴스≫ ˝에무나˝와 ˝피스티스˝의 올바른 이해

먼저 믿음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살펴보자.어느 학자는 구약에서 믿는다라는 에무나 동사가138번 나오지만 명사는 찾기 힘들다고 했다.또한 어느 학자는

www.reformednews.co.kr

https://m.cafe.daum.net/hyosukBiblestory/2h8w/205?listURI=%2FhyosukBiblestory%2F2h8w

 

피스티스(pi,stij) 신학논쟁

바울의 영감인식론과 피스티스의 함의 1. 들어가는 말 종교적 의미로서의 ‘피스티스’(pi,stij)에 대한 강조는 분명히 신약의 특성이다. 유대에 기원한 당시의 어떤 종파나 운동도 믿음을 요구하

m.cafe.daum.net

 

 

국어사전에서 파고들어 살펴보는 믿음, 충성, 정성, 성실, 신실, 신뢰, 충실, 미쁘심의 뜻

**믿다**

1 어떤 사실이나 말을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다고 여기다.

2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의지하며 그것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다.

3 절대자나 종교적 이념 따위를 받들고 따르다.

 

**의지하다** (依支하다)

1 다른 것에 몸을 기대다.

2 다른 것에 마음을 기대어 도움을 받다.

 

**기대하다** (期待하다/企待하다)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다리다.

 

 

**충성하다** (忠誠하다)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바치다.

 

**진정**5 (眞情)

  1. 참되고 애틋한 정이나 마음.
  2. 참된 사정.

**정**17 (情)

  1.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2.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
  3. 혼탁한 망상.

**마음**

  1.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
  2.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나 태도.
  3. 사람의 생각, 감정, 기억 따위가 생기거나 자리 잡는 공간이나 위치.

**정성스럽다** (精誠스럽다)

보기에 온갖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이 있다.

 

**성실하다**2 (誠實하다)

정성스럽고 참되다.

 

**참되다**

진실하고 올바르다.

 

**진실하다** (眞實하다)

마음에 거짓이 없이 순수하고 바르다.

 

**순수하다**2 (純粹하다)

  1.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다.
  2.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다.

**올바르다**

말이나 생각, 행동 따위가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이 옳고 바르다.

 

**바르다**3

  1. 겉으로 보기에 비뚤어지거나 굽은 데가 없다.
  2. 말이나 행동 따위가 사회적인 규범이나 사리에 어긋나지 아니하고 들어맞다.
  3. 사실과 어긋남이 없다.

 

**신실하다** (信實하다)

믿음직하고 착실하다.

 

**믿음직하다**

매우 믿을 만하다.

 

**착실하다** (着實하다)

  1. 사람이 허튼 데가 없이 찬찬하며 실하다.
  2. 일정한 기준이나 정도에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다.

**찬찬하다**1

성질이나 솜씨, 행동 따위가 꼼꼼하고 차분하다.

 

**꼼꼼하다**

빈틈이 없이 차분하고 조심스럽다.

 

**차분하다**1

마음이 가라앉아 조용하다.

 

**실하다**2 (實--)

  1. 실속 있고 넉넉하다.
  2. 일정한 범위에 거의 도달하거나 들어찰 정도이다.
  3. 일하는 것이 빈틈이 없이 능숙하며 착실하다.

 

신뢰하다 하다

  • 동사 굳게 믿고 의지하다.

굳다 ( 활용형: 굳게 )

  • 1.동사 무른 물질이 단단하게 되다.
  • 2.동사 근육이나 뼈마디가 뻣뻣하게 되다.
  • 3.형용사 누르는 자국이 나지 아니할 만큼 단단하다.
  • 4.형용사 흔들리거나 바뀌지 아니할 만큼 힘이나 뜻이 강하다.

의지하다 하다

  • 1.동사 다른 것에 몸을 기대다.
  • 2.동사 다른 것에 마음을 기대어 도움을 받다.

 

  • 명사 충직하고 성실함.
충직 
  • 명사 충성스럽고 정직함.
  • 명사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음.

 

  • 형용사 믿음성이 있다.
믿음성 믿음
  • 명사 굳게 믿고 의지할  있는 성질.

 

 

본문에서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및 헬라어의 격은 성경 어플리케이션 '베들레헴'의 원전분해를 활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