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기도 산책
2023년 10월 31일 화요일, 새벽기도
redsiwon
2023. 11. 1. 15:40
-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들리지 않게 된 건지, 모든 말씀이 퉁겨져 나갔다. 직접 말씀을 보기도 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집중해서 설교 말씀을 들어보기도 하고,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하기도 해보았지만 이 이루말할 수 없는 답답함,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의 어두움은 가시질 않았다. 단 위에서 기도 찬양을 부르면서 계속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는 말씀(롬6:23)이 떠올랐다. ‘아.. 나의 이 어두움은 사망이구나. 죄의 삯인 사망, 곧 하나님과의 단절이 바로 이런 거구나. 이 땅에서 맛보는 지옥의 그림자가 이런 거구나..’
- 축도로 설교가 마무리되고 주여 삼창 외치며 기도의 함성소리가 곳곳에서 울려퍼진다. 나의 마음은 여전히 멍했다. 어찌해야 할까, 기도는 해야 할 것 같고,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울고 싶기도 하고 울기 싫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하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렇게나 기도하지 말고 오직 말씀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시편 51편이 떠올랐다. 다윗은 긴긴 고난의 광야 세월을 거쳐 왕이 되었으나, 안락함에 취해 밧세바를 범하고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죄를 깨닫고 간절히 주님의 죄사함과 임재를 구했다. 가난한 심령으로 말씀을 읽어가다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마주했다. “주의 임재로부터 나를 쫓아내지 마시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지난 주부터 시작됐던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나의 생각을 꿰뚫는 말씀이었다. 몸에 소름이 끼쳤다. 말씀을 따라서 기도했다. ‘주의 신실하신 사랑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터져나오는 눈물과 함께 어찌할 바 몰랐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씻겨져 내려갔다.
- 당장 마음은 평안해졌다. 진짜 말 그대로 떠나갔던 성령님이 돌아오신 건가 싶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기도해야 했다. 앞으로가 두려웠다. 또 반복될 것 같았다. 앞으로 잘 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때 히브리서 3장의 권면의 말씀이 떠올랐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중에 누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완고하게 되지 않게 하라(히3:12~13)” ‘아, 내가 너무 멀리 보고 있었구나.. 오늘만 사는 거구나, 오늘 주신 주님의 은혜, 오늘의 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거구나.. 아멘. 감사합니다 주님.. 다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마음에 새겨지길 원합니다.’
- 그러나 여전히 내 안에 높아진 생각, 버릴 수 없는 생각, 내가 믿는 진리, 나만의 진리.. 이것들은 영영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왜 전도하는가? 왜 선교하는가? 그것들이 믿지 않는 자들을 사랑하는 참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진심어린 따스한 관심의 말과 행동이 모이고 모여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그분 앞에 다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해당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을 가르치고 제자삼기에 앞서 믿는 자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을 모르는 전도는 전도가 아니다. 말만 남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눈물을 닦아내며 기도하는데 또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생각나는 문구로 말씀을 찾아서 찬찬히 묵상했다. 이 말씀은 수고하고 짐진 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주님의 위로이자 또 한편으로는 주님의 멍에를 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인 것으로 지금까지 생각해왔는데, 이번에는 왜 주님께서는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는지에 대해서 주목하게 되었다. 이 말씀의 직전에는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비밀을 찬양하긴 하시지만 더 큰 맥락에서 그 전과 이 말씀 후 다음장으로는 율법에 갇혀있는 바리새인들을 가르치시고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에 대해 꾸짖으시는데, 그들의 모습이 주님 당신께서 스스로를 가리키시는 표현인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와 대비되는 ‘교만함’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말씀이 새롭게 깨달아졌다. ‘아..! 교만함의 멍에 대신에 예수님께서 지고 계시는 온유함과 겸손함의 멍에를 지고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배우라고 하시는 거구나..!’ 그렇게 말씀이 와닿았다. 나는 계속 내가 높아지려고 했었다. 관계의 많은 경우에 내 생각이 더 맞는 것 같았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런데.. 내가 계속 교만함의 멍에를 메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왜 그동안 그렇게 내가 맞다고 생각했던 걸까? 주님의 멍에를 메리라 다짐한다.
- 그럼에도 나는 이 사랑의 진리를 주님께서 내게 직접 주셨다고 믿는다. 내게 있는 마음의 불편함은 뭘까? 서로 진리가 다르고, 나는 내 진리가 맞고, 이 불일치를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각자의 그릇에 담긴 진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일 수 있을까? 오히려 각자의 그릇에 담아주신 각자의 진리는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부분이 아닐까? 그래서 이 그릇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내게 주신 진리를 가지고 남을 설득하기 보다는 삶으로 이 진리를 살아내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닌가! 온유함과 겸손함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임재 안에서 이 진리를 살아내보자!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이 무섭다. 죄를 통해서만 은혜에 다다를 수 있다면 너무 끔찍하다. 더는 싫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게 현실이다.. 은혜를 받기 위해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죄를 지었고, 죄를 지을수록 은혜가 풍성해진다..
- 나의 지경을 넓히소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내’가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게 하소서. 지금 나에게 주신 나의 원띵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이고,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