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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하드커버) | C. S. 루이스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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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도덕법칙, 인간 본성의 법칙, 옳고 그름의 법칙, 자연법, 도덕률 다 같은 말이다.
도덕률이란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인' 판단 기준을 뜻한다. 여기서 '보편적인'이 중요한데, 모든 시대와 민족, 문화권을 통틀어, 모든 사람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정한 방향으로, 즉 가치의 우열을 두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C. S. 루이스는 이 도덕률이 존재함을 주장하며 여러 반론들에 대하여 답변하는 방식으로 주장을 견고히 세워간다. 대표적으로 도덕률은 일반적인 본능과 다르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본능을 평가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실재한다. 일종의 메타본능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것을 도덕률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도덕률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1-3에서 발생한다. 이 도덕률의 출처, 근원은 어디냐는 것이다. 저자는 내부에서 온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이 주제에 관한 설명의 후반부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들은 바른 행동을 한다고 해서 특정 개인이 특정 순간에 유익을 얻는 것은 아니더라도, 인류 전체로 볼 때에는 유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어떤 것을 '옳게' 느끼거나 '그르게' 느끼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왜 이기적이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 "사회에 유익을 주려고"라고 대답할 경우, "왜 개인적으로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때에도 사회의 유익에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라는 질문에 "사람은 이기적이면 안 되니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1-3 이 법칙의 실재성, 47-48p
저자는 이를 비롯하여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이고 이것들을 도덕률이 인간 내부적으로 발생할 수 없다는 근거로 삼아 1-4부터는 도덕률이 인간 외부에서, 즉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주장한다.
나는 이 지점이 논리가 성립되지 않은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도덕률이 인간 내부적으로 발생할 수 없다는 주장이 성립되지 않았다. 이기적이면 안 된다는 도덕률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나, 사회적 유익이 아니라 개인적 유익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기심을 내려놓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더 큰 친밀감과 신뢰를 갖는 관계를 통하여 장차 다가올 위험을 대비할 수 있는 유익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학습되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엄밀한 의미의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진화론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충분히 납득가능한 설명이다.
정리해서, 아무리 잘 쳐줘도 "도덕률이 인간 내부적으로 발생했는지 알 수 없다."가 맞고, 내부적 발생은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충분히 개연성 있다. 외부적 발생도 충분히 개연성 있다. 그러나 진화론적 관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외부적 발생의 가능성을 한사코 부정할 것이다. 나는 신을 믿지만, 도덕률은 인간에게서 비롯됐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탄의 미혹인가? ㅎㅎ)
다만 도덕률을 초월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 우연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할 경우, 도덕률은 초월적인 당위성을 상실하고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다는 느낌만 남게 된다. 즉 사람이 갖는 이 보편적인 느낌을 일관적이고 공통된 기준으로 삼을 당위가 없다는 뜻이고, 결국 선악을 논할 수 없게 된다는 논점이 하나 생겨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이유를 근거 중 하나로 삼아, 도덕률은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이라고 '믿는다'.)
저자는 나름대로 기독교를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이를 기독교 변증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의 존재나 우주의 기원은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창조론, 진화론, 창조과학에 대하여 더 논하고 싶은데 그러면 글의 제목과 다소 멀어지므로 다른 글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도덕률의 기원에 따라, 즉 유일신론 vs 범신론,무신론의 입장에 따라 각각 선악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으며, 그 정의에 따라 우리의 행위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다음 글인 2부 '그리스도인의 행동'에서 충분히 다루어질 것 같다.
참고자료: https://youtu.be/fGecCVJBwHA
위 영상에서 토론토대학 임상심리학자 조던 피터슨 교수는 비슷한 주제를 논하고 있다. 물론 위 영상의 주제는 서양에서 선악관의 역사가 유대기독교적 선악관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까지 세워져왔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고서는 우리의 선악, 가치판단에 대하여 논할 수 없다는 것이 논지이지, 신이 없으면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전자는 도덕을 논하기 위한 전제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후자는 신이 곧 도덕의 기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둘은 명백히 다르다. 그러나 댓글에서는 열심히 후자로 해석하여 싸우고 있는데 덕분에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사유할 수 있었다. 영상 게시자와 피터슨 교수님과 열심을 다하여 토론을 진행해준 댓글러 모두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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