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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는 중요하다.

인생은 우선순위 싸움임을 요즘 자주 생각한다. 비전, 소명, 사명 등 뭐 다양한 비슷한 말들로 표현되는 것 같은데, 나는 우선순위라는 단어를 쓰겠다. 좀 더 가볍고, 좀 더 가변적이고, 좀 더 주도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선순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은 하루에도 수천 수만가지의 생각과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 사소한 거 차치하고 굵직한 거로 좁혀도 그래도 한두 가지 정도는 중요한 판단과 결정이 있을 것이다. 그때 그것의 방향이 올바른지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우선순위이다. 우선순위가 중요하다는 것은 연역적이라기보다는 귀납적이다. 즉 전제와 논리로 세워진 가치가 아니라 경험과 관찰에 의해 확인된 가치다. 사람은 자기가 되려고 한다. 시쳇말로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 다시 말하면 가슴에서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처음 읽고 나서

읽고 나서의 감정가슴이 먹먹하다. 오이디푸스가 불쌍했다. 예언의 성취를 피하려고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결국 예언은 성취되었다. 그런 비참한 현실을 마주했다는 사실이 먼저 안타까웠다.고통스런 현실 앞에 인간은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결국 오이디푸스 자신에게 향하게 되었던 어리석은 저주를 그는 반드시 지켜야만 했을까? 인간은 앞 날을 알 수 없다. 또한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결국 진실을 마주했을 때, 그 진실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왜 이렇게 진실은 고통스러울까? 고통은 옳고 그름의 문제, 욕망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저지른 자가 바로 나일때, 저주와 정죄의 화살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며, 나의 욕망이 좌절될 때,..

일상/책 2026.09.25

논리는 감정을 뒤쫓는다

나의 경우,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때 이성적이라고 함은, 무엇이든 쉽게 믿고 받아들이기보다 그것이 진실로 믿을 만한 것인지 그 증거 및 타당성을 검토해보는 행동양식을 말한다. 나의 경우, 이러한 이성적 양상이 상한 감정에 대한 대응 반응으로서 공격적으로(그러나 사실은 방어를 위하여) 나타날 때가 많은 것 같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나의 교회 안에서의 신앙의 고민, 아내와의 관계에서의 고민 등의 문제는 이미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린 후에 그것에 대한 이유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인데, 그것은 일면의 진실을 나타내긴 하겠으나, 엄정한 사실이라기보다는 흔들린 감정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지 한 두해 쯤 흘렀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후로 유튜..

쇠렌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리뷰 1. 세 가지 죽음, 기독교적 관점에서

http://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8174039 죽음에 이르는 병 - 교보문고인간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을 말하다! ⚫ 덴마크어 원전을 번역한 완전 새로운 번역 ⚫ 이제, 키르케고르의 언어로 다시 만나는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을 넘어 참된 자기 자신을 발견하십시product.kyobobook.co.kr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아래와 같이 세 가지 형태의 죽음이 있다.생물학적인 죽음영적인 죽음자기부인의 죽음1번 생물학적인 죽음은 명백하고 분명하여 쉽게 관찰 가능하다. 따라서 2번과 3번이 관건이다. 2번은 영적인 죽음, 곧 정신적 죽음이다. 키르케고르의 표현에 따르면 죽음에 이르는 병, 곧 절망이다. 이것은 욕망의 좌절, 목표의 실패가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예..

일상/책 2026.07.21

저는 죄인입니다.

남의 허물에, 나의 불평에 주목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허물에, 남의 아름다움에 주목하겠습니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도 많이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힐난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우쭐댔습니다. 그게 저의 본모습이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별 문제없어 보였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도 교만했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힘든 고민으로 둔갑시키고 남들을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마음만을 오직 간직하기 원합니다. 스스로를 높이지도, 스스로를 낮추지도 않으렵니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이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께 내 자신을 맡겼습니다. 이제는 알았습니다. 진정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개종, 하는 게 좋을까?

근래에 정교회 책을 많이 읽고 있다. “신화”, “예수기도 성령체험”, “정교회 교리서”, “영적 아버지에게 듣다”, “교부들의 영적 금언집” 등. 정교회를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 정리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그것은 추후로 미루고 지금은 우선 정교회가 개신교와 뭐가 다른지 좀 정리한 후 개종을 하는 것이 좋을지, 소위 ‘하나님의 뜻일지’ 숙고해보자. 개신교가 기독교의 주류인 한국 사회에서는 개신교를 기독교로 부르고, 가톨릭과 개신교를 교집합이 전혀 없는 서로 다른 집단으로 이해하며, 정교회의 존재는 아예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그러나 정교회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가장 설득력이 강한 기독교 집단이 있다. 정교회는 역사적으로 가장 합당한 교회 공동체이다. 초대교회부터 이어지는 사도계승은 가톨릭과..

신천지가 오류인 이유(feat. 전도)

신천지에 오류가 있음은 그 그릇된 포교방식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들은 정체를 숨긴다.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여지가 없고, 철저히 계획적으로 숨기고 계획적으로 드러낸다. 즉 그들의 포교방식의 근원은 기만이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를 ‘진실’이라고 일컬었다. 흔히 진리라고 번역되곤 하지만, 해당 낱말의 가장 쉬운 의미는 ‘참’이다. 해당 낱말은 그리스어로는 알레데이아, 히브리어로는 에메트에 대응된다. 그리스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는 부정접두사 아-가 붙어 감추인 것이 없이 온전히 드러나있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에메트(אֱמֶת)는 변치않는 단단함, 정직함, 사실을 뜻한다. 참으로 그렇다. 예수는 거짓이 없는 분이다. 그렇다고 믿으며, 그렇기에 믿는다. 참의 가치는 부인할 수가 없다. 참과 거짓을 ..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feat. 담임목사님)

우리 담임목사님은 나와 정말 다르다. 죄송하지만 요즘 내 인생의 고난의 3할은 담임목사님과 관계가 있다. 설교를 듣고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어서 아내한테 이야기 꺼내면 조금 정제되지 못한 표현 꼬투리 잡혀서 바로 뚜드려 맞고 혼자 또 삐져서 집안이 전쟁 상태가 된다. 시간이 흘러 많이 무뎌지긴 했으나 여전히 해묵은 감정이 남아있다. 왜 이렇게 나는 힘들까. 나는 그 이유가 우리가 서로 너무 많이 달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요즘들어 나는 권위에 대해 경계가 강한 사람이라는 걸 더욱 깨닫는다. 권위는 철저히 기능에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곧 실제적인 유익을 주지 못하는 단순한 질서로서의 체제는 빠른 시일내에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성경 말씀과 설교자의 카리스마의 조화에 따른..

지옥에 대하여

예수를 믿지 않으면 정말 불지옥에 가게 될까? 성경에 의하면 그렇다. 요한계시록 후반부에 보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둘째 사망'이라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익히 접하여 알고 있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구호가 연상시키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아울러 흔히들 상상하는 '지옥'의 이미지는 육신의 생물학적 죽음 이후에 나의 영혼이나 몸이 꺼지지 않는 불이 격렬하게 타오르는 공간에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모습이다. 이 이미지는 아마 이 계시록의 구절들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으면 불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불지옥이 뜻하는 바가 정말로 우리의 통념의 상상과 일치하는 걸까? (물론 '예수를 믿는다'의 범주 문제나 '예수를 모르면'의 문제가 남아있지만, 그 문제들은 ..

키르케고르 딜레마

그리스도인의 앎의 추구는 자기기만에 불과한가키르케고르는 에서 성경 말씀을 대하는 신자의 태도에 대해서, 암호로 쓰여진 연애편지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이 편지를 읽는 방식에 대하여 두 가지 방법을 비교하는데, 첫째는 온갖 암호 해독서를 갖고서 먼저 모든 암호를 다 풀려는 것과, 둘째는 특정한 행동을 촉구하는 일부분만이라도 해독이 된다면 그것을 즉시 실행하는 것이다. 두 가지 중 키르케고르는 말씀을 대하는 태도로서 후자의 방식이 바람직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의견에 설득이 되었다. 실제로 기독교적으로 뭘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기독교적 삶의 자세는 분명하다. 물론 처음엔 오해가 있지만, 그의 이야기처럼 선을 품고, 언제나 선을 품기 위해 애쓰다보면 조금 빗나간 부분은 자연스레 조정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