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앎의 추구는 자기기만에 불과한가
키르케고르는 <자기 시험을 위하여>에서 성경 말씀을 대하는 신자의 태도에 대해서, 암호로 쓰여진 연애편지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이 편지를 읽는 방식에 대하여 두 가지 방법을 비교하는데, 첫째는 온갖 암호 해독서를 갖고서 먼저 모든 암호를 다 풀려는 것과, 둘째는 특정한 행동을 촉구하는 일부분만이라도 해독이 된다면 그것을 즉시 실행하는 것이다. 두 가지 중 키르케고르는 말씀을 대하는 태도로서 후자의 방식이 바람직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의견에 설득이 되었다. 실제로 기독교적으로 뭘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기독교적 삶의 자세는 분명하다. 물론 처음엔 오해가 있지만, 그의 이야기처럼 선을 품고, 언제나 선을 품기 위해 애쓰다보면 조금 빗나간 부분은 자연스레 조정되는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끄심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지식욕이다. <팡세>에서 파스칼이 인용한 것처럼, 지식욕은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지적한 안목의 정욕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계속 지식을 탐하게 되니까 말이다. 사람은 지속적으로 더 알고 더 분별할 수 있기를 원한다. 실제로 그 과정에 만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걸까. 키르케고르가 지적한 바처럼,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자기기만이 아닐까.
분명하게도, 키르케고르의 텍스트는 참으로 신선하고 놀라운 깨달음의 연속이다. ‘아 진짜 기독교란 이런 거구나’하는 감탄의 연속이다. 그럼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기독교는 가짜인가. 키르케고르의 텍스트를 읽고나서는 가짜로 여겨진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속였다기보다는 인간의 지성적, 정서적 한계로 인하여 자연히 속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은밀하게 진리가 숨겨져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런 비밀을 캐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뭔가 좀 서투르고 투박해 보이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믿음의 분량에 따라(롬12:3)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내가 속한 교회의 목회자분들과 충성된 성도분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다년간 시간의 흔적을 돌이켜보면 이분들의 긍정적인 변화가 느껴진다.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시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보면 키르케고르의 텍스트를 꽤나 열심히 읽어온 나는, 더 나아가 과학적, 탐구적, 연구적 정신은, 과연 키르케고르적인가. 여기서 모순이 엿보인다. 그의 문학적 장치가, 모든 유려한 서술이, 수많은 가명들이, 비록 그는 그러한 것들이 최선의 노력의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싶은 기독교 정신의 요체를 가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였지만, 기독교를 가리우게 됨으로써 스스로 모순을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 쓰고 보니, 또 한편으로는 이 딜레마에 너무 몰입하여 앎을 향한 추구 모두를 비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고 싶은 것이 어찌 온전히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선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행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설령 알지 못하고 행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일 뿐 참된 지식에서 나온 선한 행위가 아니다. 장님이 위험을 모르는 것이 용기가 아니듯 말이다. 사도 바울 역시 골로새서 1장 10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더 자라도록 기도한다.
결국 사랑하는 대상을 더 알기 원하는 마음은 귀하다. 다만 그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의 뜻마저 무시할 정도로 앎 자체를 더 사랑하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십일조라는 형식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공동체와 부족한 자를 위한 공유와 섬김이라는 본질적 차원에서 실현되지 않고, 오직 그 앎과 행위만 남아서 그렇게 행하는 자신을 자랑하며 그렇게 행하지 않는 남들을 무시하는 주객전도처럼 말이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예수께서 신랄하게 비판하신 위선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타인의 허물을 비추는 서치라이트가 아닌 내 발의 등불이다
최근 들어, 아니 어쩌면 꽤나 오래전부터, 키르케고르의 텍스트로 진행되는 독서모임에서 이런 부분에 관한 불쾌감이 있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지적인 향유를 위한 모임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이 모임이 각 구성원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보다는 단지 다소 난해한 키르케고르 텍스트의 암호해독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부정적 관점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향한 시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부정적 시선, 곧 심판자의 시선이 되었다.
말씀은 어디까지나 내 발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타인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서치라이트가 되는 순간, 그런 지식은 나를 교만하게 만들 뿐이다. 사랑만이 세운다(고전8:1). 이런 점에서, 내가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될 부분에서 또 다시 심판자가 되는 우를 범했기 때문에, 불쾌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앎을 좇는 사람을 비난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자. 내가 그것이 불쾌하다면, 그저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된다. 그에게는 그것이 더 필요한지 어떤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나를 아는데, 나에게는 지식을 위한 지식보다 실천에 이르는 지식과 실제 실천이 더 필요하다. 그것이 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길임을 믿는다. 이것이 나의 믿음의 분량이다. 남을 보지 말자. 나를 바라보고 예수를 바라보자(히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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