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봤다. 이 영화가 동기부여 관련해서 아주 좋은 영화라고 추천해주는 것을. 게으름에 허우적거리다가, 봤다.
이 영화는 무엇에 대하여 동기부여를 해주는가. 적어도 내가 봤을 때 이 영화는 삶의 목표가 있는, 좀 더 멋있게 말해서 꿈이 있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영화이다. 나처럼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에게 적합한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리고 영화가 진짜 영화다웠다. 영화스러웠다. 영화같았다. 중후반부부터. 그게 마냥 좋은 의미는 아니다. 아무튼, 너무 영화라서 웃음이 났다.
멋있다. 부럽다. 꿈이 있다는 게. 무언가에 대한 열정이란 게 유전자로 태생부터 주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무언가에 미쳐있는 사람들은 잠재된 열정이 발현된 것이고, 나같이 게으름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은 열정의 씨앗조차 물려받지 못한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 나에게, 삶의 의욕이 없는 나에게, 이런 영화 스토리는 감동과 함께 절망을 준다. 누군들 처절하게 노력하고 싶지 않겠는가? 아니, 나는 진정으로 노력하고 싶은가? 가슴 한 켠에서는 영화 속 앤드류와 플레처의 모습을 진정한 노력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외치고 있지만, 다른 한 켠에서는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라고 자그맣게 웅얼거리고 있다. 무엇이 진실일까? 나는 무엇이 진실인지 모른 채 열 여덟 살 때부터 줄곧 방황하고 있다. 내 삶은 여전히 거기에 멈춰있다.
할 수 있는 게 진실이라면 나는 왜 지금까지 안 했을까? 아니면 할 수 없는 걸까? 그러면 왜 살지? 할 수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할 수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다. 아니,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노력은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한 의지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의지. 의지? 하고자 하는 마음. 마음. 마음? 시시때때로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래서 초심을 말한다. 처음의 마음. 이 처음의 마음은 마치 고향과 같다. 샛길로 새면 후회하고 결국 계속 돌아가게 된다. 초심을 지키지 않으면 후회를 한다. 왜 그랬을까, 자책을 한다. 그러고 싶지 않다. 의지를 관철시켜 무언가 성취해내고 싶다. 이게 내 마음의 고향이다.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위에서 말했잖아.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해내야만 한다. 내가 해내면 그것이 나에게는 진실이 되고, 해내지 못하면 거짓이 되어 나와 함께 영원히 잠든다.
그렇다면 노력의 대상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일단 눈 앞에 놓인 것을 하자. 이미 노력의 단계를 넘어선 누군가는 자아실현의 단계를 말한다. 그들은 자신을 미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찾은 사람은 그것에 미쳐 행복에 겨워 산다. 정확히 말하면 적어도 자신의 삶에 대하여 불행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멋있다. 부럽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나는 아직 노력의 단계에 머물러있다. 현실을 직시하자. 깝치지 말자. 일단 눈 앞에 놓인 것에 대하여 노력하자. 지금 내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노력의 대상이 아니라 노력 그 자체이다. 스무 살 때 끝냈어야 할 일을 아직까지도 끝내지 못했으므로, 나는 지금 이 노력이라는 한계를 일단 깨부숴내야한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눈 앞에 있는 것부터 하자.
훗날 노력의 단계를 뛰어넘게 되면 말하고 싶다. 그렇게 믿고 싶지 않지만 노력도 재능인 것 같다고 체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니,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나도 했다고. 당신도 할 수 있다고.
리뷰를 구실로 의지를 표출한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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