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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2012)> 리뷰 - 무엇을 믿을 것인가?

redsiwon 2020. 8. 9. 15:33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2012)

 

자체 평점: 4점 (5점 만점, 1=어리둥절, 2=별로, 3=괜찮았지만 다시 보고 싶진 않음, 4=다시 보고 싶을만큼 인상적, 5=인생작)

 

큐브를 보고나서 빡친 나머지 다른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싶어서 고른 영화가 이것이다. 큐브는 보다가 빡친 영화인데, 리뷰를 쓰니까 거의 1시간이 걸렸다. 리뷰도 이어서 바로 쓴다. (아니 근데 큐브 평점 1점 줬는데 리뷰를 쓰고 보니까, 인간은 큐브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 시사를 던지는 거면 메시지는 완전 공감인데, 아 근데 표현 방식이나 소재가 아주 지랄맞고 완전 내 취향이 아니었어.)

 

피신, 일명 파이는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 단 둘이 태평양 망망대해를 부유한다. 지랄맞은 큐브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몰입이 잘됐다. 내가 바다에서 조난당한다면? (심지어 호랑이와 함께? - 솔직히 비현실적이긴 해.) 참 오싹하다. 생존의 문제를 마주한 파이는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어 보인다. 사나운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 지내며 파이의 이성은 날카로워진다.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파이라는 캐릭터는 너무 인상적이다. 흰두교, 천주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모두 믿는다. 아버지는 파이에게 종교를 여러 개 가지는 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일침을 놓아주시지만, 그런 무거운 주제가 오고가는 식사자리에서 느껴지는 훈훈한 가족의 분위기와, 천진무구한 파이의 편견없는 삶의 자세가 너무 맘에 들었다. 정말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명보트에서의 여정은.. 빼곡하게 하늘을 수놓은 별들과 그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는 드넓은 밤바다, 폭풍 속에서 자신이 믿는 절대자에게 외치는 절규, 천막 지붕 틈새 지쳐 잠든 얼굴 위로 부서지는 따스한 아침 햇살, 운명처럼 마주한 미지의 섬에서의 꿀맛같은 휴식, 그 안에서 다시금 운명처럼 마주한 겹겹이 쌓인 연꽃잎 속의 치아와 그것을 보고 느끼는 깨달음, 그리고 계속되는 여정.. 그래픽과 스토리텔링 모두 너무 환상적이었다. 메시지는 차치하고 단순히 이 여정의 모습만으로 다시 보고 싶은 이유가 된다. 두 해 전, 홀로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 북쪽길과 그 때 들었던 음악들이 떠오른다. 좋은 여행, 좋은 음악처럼, 좋은 영화는 다시 체험하고 싶은 느낌을 준다.

 

마닐라에서 출발하여 중간에 배가 침몰하고, 구명보트를 타고 길고 긴 여정 끝에 멕시코에 도달한 인도 소년 파이와 뱅갈호랑이 리처드 파커. 끝내 멕시코의 어느 해변에 도착했을 때 리처드 파커가 파이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밀림만을 응시하다가 떠나버린 이유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해보이지 않았다. 뒤에 새로운 반전의 이야기가 짧고 담담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 파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소설가에게,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가 맘에 드나요?"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즉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그 이후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내 삶에 주어진 선택지에는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있는가? 그 믿음의 대가는 무엇인가? 어떤 책임을 져야하는가? 수많은 질문이 연거푸 쏟아진다. 살아가면서 하나씩 채워가야지.

 

고독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지만, 한편으론 이런 고독 속에서도 잠시나마 여유를 만끽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다. 지금의 이런 마음이면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가야지. 어찌됐든 이건 내가 시작한 이야기니까.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믿는 대로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