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영화

큐브 (Cube, 1997) 리뷰 - 어쩌라고

redsiwon 2020. 8. 9. 14:48

큐브 (Cube, 1997)

자체 평점: 1점 (5점 만점, 1=어리둥절, 2=별로, 3=괜찮았지만 다시 보고 싶진 않음, 4=다시 보고 싶을만큼 인상적, 5=인생작)

 

나는 보통 영화를 보고나면 네이버 영화라든가, 위키 검색을 하여 관련 정보를 추가적으로 찾아보고 리뷰를 읽어본다. 큐브2는 TV에서 우연히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큐브2는 원작을 망친 졸작이고 큐브가 볼 만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주말에 영화나 한 편 때려야지 고민하다가 그동안 미뤘던 이걸 보자고 해서 봤는데 진짜 시간이 아까웠다.

 

첫 등장 인물이 썰려 죽는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열린 결말의 진실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누가 큐브를 만들었고, 왜 만들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보고나서 진짜 내가 뭘 본 거지 싶었다.

 

다만 큐브 내부에서 '탈출'이라는 공동의 목적이 표출되다보니 잠시나마 그 안의 상황에 몰입할 수는 있었다. 실제로 내가 저런 상황에 닥쳤다면, 나는 어땠을까?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했을까? 잘 모르겠다. 너무 허구적인 상황이라서 굳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생각해봐야 할까라는 의구심만 든다.

 

등장인물에 관해서 말해보자면, 이름도 기억못하겠는 진-주인공 느낌의 흑인 경찰에 대해서는 꼭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다. 중간에 의사 아줌마 떨어뜨린 점이나, 수학과 학생한테 둘만 도망치자, 자물쇠니 열쇠니 지랄 옆차기했던 점 등,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거지? 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물론 의사 아줌마 손 놓은 거는 극한 상황이라는 측면에서 불안, 흥분, 분노 이런 복합적인 감정에 의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이해는 되지만, 실질적으로 자기는 도움준 것 1도 없으면서 구성원들에게 의지를 강요하고 민폐 끼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큐브 표피 설계자가 문으로 찍어버릴 때 약간 통쾌했다.

 

 물론 나에겐 아주 역겨운 경찰 아저씨였지만 한 가지 시사점은 있다. 바로 '동기 부여'이다. 가장 강력하게, 사실상 유일하게 큐브 내부에서 '탈출'이라는 목적의식을 표출하고, 그럼으로써 구성원 전체에게 한 가지 목적을 부여하여 하나의 그룹으로서 결속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이끌어 간다. 능력이 있으면 더 좋지만 능력이 있든 없든, 뚜렷한 꿈과 목표가 있는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이끌어간다. 스티브 잡스가 그랬고, 일론 머스크가 그러고 있다. 냉전체제 시절, 케네디 대통령이 나사의 청소부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을 때 그 청소부가 자신은 사람을 달에 보내는 일을 돕고 있다고 한 것처럼 동기부여는 삶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가끔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보면 고독하고 외롭고 막연한 이 인생이 너무 덧없게 느껴져서 온 몸에서 기운이 쫙 빠지고 무기력해진다.

 

 쓰다보니 한 인물이 더 생각났다. 초반에 화학물질에 의해 얼굴이 녹아서 죽어버린 센서 전문가 할아버지다. 일찍 죽음을 맞이하긴 했지만, 경험에 의지해 나름의 돌파구를 생각해내고 그대로 묵묵히 실천하는 가장 멋있는 캐릭터 아닌가 싶다. 그러고보면 이 할배도 탈출을 바로 목적으로 삼았다.

 

생존 본능. 삶의 목적. 생존 본능은 생물학적인 기제이고, 삶의 목적은 철학적인 주제이다. 진격의 거인에서 케니가 죽을 때 했던 말이 생각난다. 확실히 인간은, (내 생각에 특히나 생존이 큰 걱정거리가 아닌 현대의 인간은), 돈, 여자, 술, 마약, 권력, 폭력, 명예 등, 어떤 것에든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삶의 목적 따위는 말 뿐이니까. 그저 공허감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너무 허무해서 신이라도 믿어볼까 싶은 생각이 든다.

 

불현듯 내가 내 스스로를 공허감으로 몰아가고 있는 건가 의구심과 함께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어쨌거나 허무함과 외로움은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삶의 목적은 말로서만 존재하지만, 외롭지 않고 싶은 마음은 현실이다. 결국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에 미쳐야 한다. 일찍 죽어간 센서 전문가 할배처럼 살자.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이 그런 거지 뭐. 또 다시 나가야지. 잊어야 살 수 있다. 잊기 위해 살아간다. 살다보면 잊는다. 무한 궤도.

 

인간은 큐브에서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