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9:12~10:7
하나님은 뿌린 만큼 거두게 하신다. 남에게 준 만큼 받게 하신다. 따라서 언제나 부요케 되어서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다.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은 그들의 가난을 채울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찬양하도록 이끌어 준다.
나는 어떻게 베풀 수 있을까? 21세기 대한민국을 살면서 직접적으로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이 시대는 물질적 가난보다 정신적 가난이 만연한 세대다.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자. 하다보면 정신적으로도 부요하고 여유로운 사람들도 마주할 수 있고, 그러면 그들에게 받아서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자.
사도 바울은 편지로만 담대하고 같이 있을 땐 유순하다고, 속된 생활을 한다고 비판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하느님 아는 것과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의 중심 외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음을 역설하며, 누군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사도들 역시 그리스도인임을 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입장만 옳은 것처럼 굴면서 다른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자신에게 있다면, 스스로를 돌이켜봐야 한다. 내가 옳다는 주장은 나는 더 이상 변하지 않겠다는 것,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소통이다. 소통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눅4:1~15
예수님은 셰레를 받은 후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셔서 40일간 주리시고, 그 후 악마의 유혹과 마주하신다. 그 악마의 유혹을 모두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내 내면에 어떤 이야기를, 어떤 믿음을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여겨진다. 사람에게는 양심의 자유가 있는데, 그 양심을 하느님께 맡길 것인지, 악마에게 맡길 것인지, 인간은 하루에도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렇게 유혹을 이겨내신 후에는 성령의 능력을 받고서, 이제서야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신다.
사람이 남을 도우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