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기(2024)

행복한 삶이란

redsiwon 2024. 12. 30. 01:03

홀로 걷는 길

인간이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다.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극히 외롭다.

 

나는 오랫동안 씨름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초에는 성실이라는 과업이 주어져 있다. 그 성실은 깨어있음과 실행, 순종을 포함한다. 결심한 바 어떤 결과를 얻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힘이다. 정직하게 나는 아직 이 힘이 부족하다. 이 힘을 길러야 한다. 그것이 나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다. 아니 행복한 삶도 사실 거창하다. 실은 그저 살고 싶은 것이다. 다만 그 살고 싶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잘 살고 싶다는 바람이 수반되는 것이다.

 

오늘은 예배를 드리고 왔다. 책을 보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남은 시간에는 코딩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야동을 보고 유튜브를 보고 디시를 봤다. 나는 여전히 이렇다. 이런 내가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니.. 감사.. 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그래 둘 다가 맞다. 감사할 건 감사하고, 슬퍼할 건 슬퍼하고.

 

나는 20대 초반 무렵엔 일기를 참 많이 썼다. 그때는 특히나 손 글씨로도 많이 썼다. 그 시절의 일기를 보면, 가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운다. 그 시절의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리고 내가 여전히 그대로라 슬퍼서.

 

이제는 자책도, 비교의식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것은 분명히 내가 배운 기독교 신앙 덕분이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나는 절망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키르케고르는 절망에 대해서 말하는데, 진짜 절망은 죽고 싶은데 죽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파괴는 자기를 파괴할 뿐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영원한 것이니까. 반면에 자책감과 열등감은 일시적인 것이고 이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파괴의 운동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끊임없이 괴로움만을 되풀이한다.

 

이 괴로움을 뒤로 하고 이제 그만 성실하게 살자고 몇 번이고 다짐해도 사람이 참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바뀌고 싶다. 바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나다. 나는 그걸 이뤄야 하는 책임을 맡은 존재다.

 

때때로 혼자는 힘들어서 누군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도움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문제를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퍽 어색하고 쑥쓰럽고 괴롭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과업이고, 이 과업이 나이기 때문이다. ‘나’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생각해보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다. 일기를 쓰는 것이다. 명상이다. 이 세 가지는 본질적으로 같다. 자기를 보는 것이다. 기도가 자기 욕망을 신께 졸라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기도의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점차 배워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배웠기로 기도란, 내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관찰하며, 그 구하는 것이 합당한지 점검하고, 그 구할 것을 확정하고 마음에 새기는, 자기 관찰적인 동시에 자기 생성적인 행위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심오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뇌과학적으로도 그게 맞을 거다. 전두엽, 특히나 전전두엽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행위니까.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참 좋고 감사하다. 난 이 밤 시간에는 쇼팽의 녹턴 op9 no2를 즐겨 듣는다.

 

결론은, 기도해야 한다. 그동안 너무 기도를 안 했다. 기도를 할 때, 순간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가 되어, 즉 육으로서의 내가 영으로서는 그리스도가 되어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낳는다. 이것을 사는 동안 내내 반복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기도하자. 기도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다. 거봐.. 기도하니까, 중구난방이긴 해도 내 안에 있던, 9년전의 도민이는 알지 못했던 그것들이 흘러나오잖아.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영원히 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그 자신 안에서 샘솟는 물을 주신다고. 내 안에 그분이 주신 물이 이미 있는데, 기도하지 않으면, 그 물을 마실 수 없다.

 

울자. 부끄러워 하자. 지금은 울어야 할 때고, 부끄러워 할 때다. 부끄러운 짓을 했으니까. 불쌍한 짓을 했으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알지 못해서 아무도 나를 위해 울어주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 자신만큼은 나를 위해 울어 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위해 도무지 울어줄 수가 없다.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 뿐이다. 자신 안에 있는 그 영원만이 자신을 안다. 그러나 그 영원을 기억하지 않으면, 나타내지 않으면, 그 영원도 나를 알지 못한다. 영원은 오직 내가 알아줄 때만 나를 알아주기 때문이다.

 

한 이틀, 사흘이 지나면 눈물이 마를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울 때가 아니라 계속해서 나아갈 때라는 뜻이다. 평안함에 감사하자. 행복하다는 증거다. 슬픔도, 분노도 없는 그때, 그것이 행복임을 기억하자. 나의 영원과 입맞춤하며 인사하자.

 

오랜만에 글을 썼다. 감사하다. 나는 아직 살 수 있다. 죽었다가 살아나면,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회개의 눈물이고, 희망의 눈물이고, 회복의 눈물이고, 기쁨의 눈물이다.

 

그러나 평안함을 사모하자. 영원을 사모하자. 계속 살아있자.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죽었을 때만 기억하면 된다. 살아있을 땐, 죽지 않기로 하자. 그것만 기억하자. 그것에만 전념하자. 언젠가 또 죽을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지금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때의 내가 담당할테니, 나는 지금의 나를 지키자. 내 자신을 아끼고 돌보자. 사랑한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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