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기도 산책

삶의 목표 - 너는 꿈이 뭐야? 목표가 뭐야?

redsiwon 2020. 10. 9. 03:10

어제 내 친구 정수빈이와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밤공기 속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수다를 떨었다. 두서없이 이런 저런 얘기하다가 수빈이가 나에게 물었따. "오빠는 꿈이 뭐야?" "목표가 뭐야?"

 

1. 꿈

  수빈이는 꿈을 "실현가능성 없지만 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꿈에 대해 얘기했고 이어서 나의 꿈을 물었다. 당시에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래서 답을 흘렸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찬물로 샤워를 하면서 정신을 맑게 하고 곰곰히 생각해봤다.

  꿈. 내가 생각하는 꿈은 다르다. 내 나름대로 유사 개념들을 몇 가지 단어로 정리해보려 한다. 일단 먼저 앞선 예로,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실현가능성이 없다면 나는 그것을 '망상'이라고 부른다. 실현가능성이 없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지양해야 할 바이다. (여기까지 썼는데, 문득 그럼 판타지 소설은 나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똑부러지게 정리하지는 못하겠다. 뭔가 결이 다르긴 한데, 지금으로서는 상상과 망상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진부한 표현만을 남긴 채 넘어가련다.) 바라는 것에 실현가능성이 있어야 비로소 나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 현재 실질적으로 무언가 행동을 하거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더 이상 꿈이라고 부르지 않고 '목표'라고 부른다. 어차피 행동하지 않으면 실현가능성은 의미가 없으므로 꿈이나 망상이나 차이가 없다. 목표만이 의미가 있다. 일단은 그렇게 정해두고 넘어간다.

 

2. 목표

  결국 목표라는 주제로 왔다. (뭔가 돌아온 느낌. 다시 돌아올 것 같은 느낌.) 한동안 잊고 있었다. 당장 눈앞의 문제, 이를테면 적절한 수면 및 운동습관 등 습관만들기, 여러 종류의 순간적인 쾌락에 젖지 않기, 하루를 계획하고 계획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기 등등의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큰 그림을 잊었었다. 연초에 계획을 몇 번 세웠는데 계속 비슷한 방식으로 빠그라지면서 의욕을 상실했고 연 계획이나 중장기 목표를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이 뒤에서부터는 의식의 흐름으로 작성되어 맥락파괴가 빈번히 일어나 읽기 어려울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인간 정준희와 교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뒤로가기를 누르세용

 

  목표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예전엔 바라는 것이 참 세속적이었다. 무조건 서울대를 가야겠다는 치기어린 마음에 수능을 네 번이나 본 것이다. (당시에는 서울대를 못가면 스스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매우 극단적이었다. 서울대라는 것은 당시의 나에게 단순히 학벌뿐만이 아니라, 아니, 오히려 중요했던 부분은 서울대는 나에게 노력의 표상이었다. 치열하게 도전해서 성취하고 싶은 열정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환경설정이라든가 여러 가지로 전략적인 면에서, 그리고 내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할 줄 아는 능력면에서 많이 모자랐고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때 장기간 축적된 나쁜 습관이 몸에 베어 지금도 나라는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데 많은 장애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뒤늦은 자기고백은 차치하고 ㅋㅋ 쓰다보니 세속적인 욕망이 아니라 순수한 열정이었다. 미화가 아니라, 진짜로. 뭔가 남에게 잘나보이고 싶은 마음도 당연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가 되고 싶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초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이었다. 의지라는 것은 결국 감정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인데, 감정은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바뀐다. 초심이라는 것은 흔들리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또 돌아가기 마련이다. 의지대로 행하는 것 자체가 허황된 망상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실현가능한 꿈으로 생각했다. 당시엔 생물학적인 기제를 몰라서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지식은 쌓였지만 고집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웅크린 채 남아있다.) 의지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의지가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을 셋팅했어야 하는데 ㅎㅎ (자기고백은 차치하고라더니 의식의 흐름으로 이 문단은 아주 빠르게 썼다.)

  다시,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잠깐, 왜 바라는 것을 구하려고 하느냐면, 이것은 삶의 이유와 연결된다. 왜 사는가? 사는 덴 이유가 없다.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이냐? 그럼에도 이유는 필요한데, 삶의 이유라는 것은 원래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므로, 인간들 각자가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삶의 이유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바뀔 여지가 있다.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경험과 그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는 필연적이고, 그에 따라 삶의 이유도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다.

  다아~~~시!!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바라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솔직히 가장 바라는 것은.. 창피하지만 연애다. 왜 창피하냐? 이것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경험 미숙이기 때문이다. 삶에 '정답'은 없지만 보편적인 양상은 존재한다. 나는 그런 보편적인 양상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창피함을 느낀다. 물론 보편성은 개나 줘버리라는 듯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더러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되고 싶으면서도 세상에 무신경하지 못하다. 모순적인 양가 감정. 세상을 무시할 용기가 나에게 없기 때문에, 결핍을 느끼고 있고 또 이 결핍을 메꾸고 싶기 때문에 나는 창피하다. 그래서 결국 바라는 것은 연애인데, 당장 내가 연애를 원하냐, 하면, 자신이 없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부족하냐?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순수한 열정', '고집'과 연관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의지대로 행동하는 초인이 되고 싶다는 어린 생각은 접었다. 나는 삶이 습관덩어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습관적인 행위가 정체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나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서 여러 전략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는 필요하다. 인간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직면한다. 결국 선택해야 한다. 갑자기 유튜브를 보고 싶은 상황에서, 갑자기 인스타 스토리를 누가 읽었나 보고 싶은 상황에서, 갑자기 카톡이 얼마나 왔나 확인하고 싶은 상황에서, 갑자기 야동보고 딸치고 싶은 상황에서, 이런 충동적인 감정대로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이것을 무시하고 공부를 한다던가 운동을 한다던가 그밖에 다른 행동을 할 것인가? 결국 선택은 의지에 달렸다. 내가 초심을 관철할 수 있는가? 내 의지는 끊임없이 갈등해왔고, 지금껏 비슷한 상황에서 대부분 충동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에 초심을 관철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것을 깨부수고 진화해야 하는데 어렵다. 어렵다고? 누군가는 내 스스로 내 의지로 행동해놓고 무슨 개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다. 좋아서 충동대로 했으면서 지랄 옆차기한다고 혀를 끌끌 찰 수도 있겠다. 나도 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창피하고, 많이 힘이 든다.

  이것을 극복하기 전에는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다른 사람에게 '진심어린'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진심어린에 따옴표 친 것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나도 인스타한다. 남들한테 관심 많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하게 사회적 '동물'로서의 본능에 불과하다. 나는 현재 누구에게도, 솔직히 가족에게도.. '인간'으로서 진심어린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남도 사랑할 수 없다는, 어쩌면 뻔할 수도 있는 경구는, 나에게는 실제로 이렇게 의미있고 뼈아픈 말이다.

 

  정리하면 난 뭐 그냥 마음 맞는 여자와 알콩달콩 장난치고 웃고 떠들면서 이것저것 함께 하면서 살고 싶다. 그뿐이다. 화성에 인간을 보내겠다는 그런 원대한 꿈같은 건 없다. 물론 전공 관련해서 나름대로 능력을 갖추고 싶은 마음은 있다. 인간은 혼자 있으나 같이 있으나 외로운 동물인데, 무언가에 몰입할 때만큼은 그런 외로움을 포함하여 모든 감정을 잊고 시간을 보낸다. 몰입의 순간만이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구나 싶다. 엘더스크롤 시리즈 같은 판타지 오픈월드 롤플레잉 게임이라든가 문명 시리즈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은 게이머를 세상과 단절된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간다. ㅋㅋㅋㅋ 웃음이 나온다. 스스로도 어떻게 보면 게임이 가져다주는 중독성의 피해자인데 ㅋㅋㅋㅋ 그래도 여전히 게임은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방식의 유희라고 생각한다. 마치 판타지 소설의 드래곤들이 인간의 형상으로 트랜스포메이션해서 유희를 즐기는 뻔한 클리셰처럼, 다른 세상을 맛보는 것. 게임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기술과 능력이 가난한 자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쁘게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자식을 낳고 자식의 성장을 보는 것도 기쁨이겠다 싶었는데, 조카들 키우는 우리 누나 부부와 덩달아 고생하는 조카들의 외할머니, 우리 엄마를 보고서는 아이를 낳는 부분에 대해서는 경솔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애 10분 보는 것도 지겨워 힘들어 죽는다..) 그리고 나는 음악이 좋다. 지금도 트래비스의 러브라는 곡이 흐른다.

  이런 꿈이 소박한 듯하면서도 따지고보면 굉장히 어려운 것 같다. 참.. 인생이라는 놈은 끊임없이 공허감이라는 시련을 준다. 그럴 때마다 내가 되새겨야 할 말은, "삶의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나의 꿈은 한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다른 여러 사람들과 관심을 나눌 수 있도록, 내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

 

3. 다 썼다.

  사실 쓰다보니 좀 깊고 쑥스러운 얘기가 나와서 에버노트에다가만 남겨야겠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뭐 글이 길어서 누가 읽을 것 같지도 않고, 만약 읽었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나에 대해 그만큼 관심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내가 글을 잘 썼을 수도? ㅋㅋㅋㅋㅋ) 하다못해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 알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만약에 혹시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갖는 누군가가 내 이야기에 공감한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

  오랜만에 머리 안에 있는 생각을 여과없이 끄집어 냈다. 이럴 땐 꼭 새벽이고, 내일 늦게 시작될 하루에 걱정스럽지만, 그래도 상쾌하다. 내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앞으로 더 잘 살아야지. 유쾌하게 살고 싶다. 토니 앤더슨의 영거를 들으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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