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통의 천복순대국밥에서 돼지국밥을 먹고 아무런 목적없이 갑천 변을 걷기 시작했다. 날이 좋았다. 햇살도 바람도 온도도 습도도 모두 적당했다. 감사합니다!
1.
생각의 시작은 이렇다. ‘나는 왜 사는가?!’ 이 생각은 그만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 지치지 않는다. 오히려 날로 새로워진다. 감사하게도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크리스천이요, 다른 하나는 이방인이다. 이것을 조금 다른 말로 하면, 하나는 스스로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스스로 왜 사는지 알지 못하고 그 의문을 잊으며 혹은 그 의문을 잊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스스로 왜 사는지를 알게 된 것은 뭔가 대단하고 우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은 진실로 위대하며, 한 개인에게 있어서 지극히 중요하다. 기나긴 절망의 터널을 지나 드디어 ‘삶’을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명활동에 있지 아니하며,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지어 만들고 붙들고 계시는 그 분 안에 거함으로써 활동한다!
기독교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은 위 글이 거북하거나 혹은 표현이 생소하여 읽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보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하는데, 먼저 용어의 구분을 하겠다. 위에서 ‘사람의 생명’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생명은 단순히 물리적, 육체적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표현이 필요하다. 이것을 ‘활력’이라고 표현하겠다. 기독교적으로는 영적인 생명, 영원한 생명, 영생, 거듭남, 부활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사람의 활력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를 연료로 한다. 니체와 빅터 프랭클의 글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반대로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없다’는 말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즉 사람에게는 의미가 필요하다. 사람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모든 일, 활동, 사고, 개념에서 궁극적으로 활력을 잃는다. ‘궁극적으로’라고 표현한 것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본능에 이끌려 어떤 일에 몰입하는 작용이 우리에게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로 의미가 없다면 그 끝은 허무함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진지한 의미가 필요하다. 의미라는 단어를 고찰 및 분해해보면 가치, 소용, 쓸모 등의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즉 철학적, 언어적으로 ‘의미’는 목적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도에 따른 것이든 본능에 따른 것이든 사람은 의미의 노예이다. 무언가의 수단이 되든 그 자체가 목적이 되든 결국 의미는 목적으로 귀결된다. 예를 들어 ‘저는 그냥 달리는 게 좋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달리기라는 활동에서 얻을 수 있는 감각적인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들도 찬찬히 살펴보면 다 이유와 목적이 있다.
그런데 그러면 이 지점에서 다시 ‘나의 삶’은 무엇인가? 나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없다. 과학적으로보면 그렇다. 우리는 유전자의 노예일 뿐이다. 철학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나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활동과 사건 사고들에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으나, 내가 나고 죽는 모든 과정을 포함한 '나의 삶'을 하나의 단일한 무언가로 놓고 보았을 때 나의 삶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존재와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다른 초월적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프랑스 소설가 까뮈는 <시지프 신화>의 첫 구절에서 “정말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표현했다. 이렇듯 인간이 삶의 의미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서 내릴 수 있는 진지하고 진솔한 단 하나의 결론은 자살 뿐이다. 저마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깝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진실이며 진실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렇게 진실을 외면한 채 '삶'에 비교했을 때 지극히 작은 눈 앞의 문제에만 매몰되어 그저 또 살아간다.
칸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내가 위에서 말한 ‘의미’에 대하여 가언명령을 떠올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사람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없으므로 초월적인 의미가 필요한데 이것을 칸트식으로 말하면 곧 정언명령이다. 정언명령은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이며 의미를 갖는다. 가령 ‘언제나 진실을 말하기’,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기’, ‘약속은 후에 잘못된 것을 알아도 반드시 지킨다’같은 자신만의 규칙이나 더 나아가 현대 자기계발식으로는 ‘나는 1000억 부자가 된다’, ‘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같은 것들 말이다. 결론적으로 다시 ‘삶의 의미’로 돌아와서, 사람은 자신의 삶에 어떤 정언명령이 필요한 것이다. 즉 사람은 저마다 어떤 정언명령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갈 것은, 사람에게 정언명령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나 어떤 정언명령이 사람을 즉시 구원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정언명령에 의하여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즉 어떤 정언명령이 한 사람에게 진실로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정언명령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다리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건이나 개념이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넘어서 그 대상과 관계를 맺고 그 대상에 의지하는 것에 이른다. 이성과 논리는 믿음에 유익하지만 이성만으로는 온전한 믿음을 얻을 수는 없으며 경험도 필수적이다. 사람은 초월적인 의미에 진실로 의지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진실로 활력을 갖고 참된 나로 살기 위하여 스스로 그 초월적인 의미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언명령과 하나가 되는 것은 나의 노력 이상의 것으로서, 마치 황량한 사막에서 걷다가 우연히 마주한 오아시스와도 같은 것이다. 즉 어떤 정언명령이 나에게 맞는 것도 같은데 아닌 것도 같은 애매모호한 시련의 기간을 필요한 만큼 거칠 수 밖에 없고, 그 기간과 강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며, 그저 부단히 애쓰고 시험해보며 그렇게 계속 걷다보면 축복처럼 선물처럼 나에게 찾아온다. "아, 이것이 진짜구나! 이제야 진짜를 만났구나!"
여기서 내가 만난 결론은 결국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다. 내 안에 있는 나는 내 자신에게 계속 내 삶의 의미를 요구했고, 이따금 그 요구를 모른 체할 때도 있었으나 결국 그 요구를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으며, 그리하여 까뮈처럼 진지하게 괴로워하고 절망했다. 그 처절한 괴로움과 방황의 시간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돌이켜보면 이루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윽고 그 끝에 예수님을 만났다. 이제 나는 비로소 내가 왜 사는지를 안다.
“(44) 예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45) 나를 보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47)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나는 그 사람을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거절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나는 내 뜻대로 말하지 않았다. 오직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내게 명령해 주셨다. (50) 나는 그가 주신 명령이 영생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해 주신 대로 말한다.”(요 12:44~50, 우리말)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첫 번째 명령이며,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4~35, 우리말)
그리고 이것이 첫 번째 명령을 성취한 자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비로소 삶을 시작한 자들에게 주시는 두 번째 명령이다.
끝으로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신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당신의 삶에 제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아멘.
아직 1번인데, 쓰다보니 시간도 많이 흘렀고, 글도 길어져서 이쯤에서 내용을 정리한다.
1. 나는 왜 사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2. 사람에게는 의미가 필요하다.
3.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눈가림하거나, 의미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인간은 스스로 그 의미를 얻을 수 없다.
4. 그러나 여전히 사람은 의미가 필요하다.
5.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이성과 자연을 초월한 믿음이 필요하다.
6. 내가 찾은 최선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해답, 즉 정답이라고 믿는다.)
7.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을 축복합니다!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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